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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삼풍백화점 구조 작업

구조 작업

파일:attachment/sampoong0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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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생존자 중 한명을 구조하는 모습


이런 대형사고에 반드시 필요한 구조 작업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사고에는 초기 구조가 중요한데,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붕괴 사태가 일어날 줄 미처 몰랐으며

체계적인 대규모 구조 작업의 개념 역시 부족하여 구조 작업 자체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후속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많은 허점까지 드러났다. 

당시에는 이런 대형 긴급 사고에 대비한 매뉴얼도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 대형긴급사고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나 그만큼 대응 체계가 후진적이었다. 

사고 이후 소방서와 경찰과 인근 군부대 그리고 특전사를 비롯하여 지역주민과 민간 자원봉사자, 해병전우회, 심지어는 주한 미군까지 

수많은 기관과 인원들이 사고 현장에 몰렸고, 

이 와중에 소방본부와 경찰과 서울시 그리고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체계적인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청와대가 개입해서 소방본부가 현장지휘를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으나, 

여러 기관들과 유족들 그리고 민간자원봉사자들 사이에 각종 불협화음이 속출했다. 

아래에 서술된 각종 앞뒤 막힌 뜨뜻미지근한 상황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구조대 인원 통제나 운영 등이 거의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고 구조 장비 관련 절단기 등의 

기본 장비가 미리 확보되지 않아 구조 작업이 지연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일을 계기로 국가적 재난에 대비해 1995년 중앙 119 구조대가 창설되었다.



게다가 사고 당일 매몰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소방차를 이용해 진압 시도를 했는데 

붕괴 사고로 수도가 끊기는 바람에 주변 옥외 소화전이 작동을 하지 않아 진화작업이 지체되기도 했다. 

사실 이 불은 자동차 엔진오일과 휘발유에서 난 불로 판명되어 구조대의 잘못된 대응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진 속의 구조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물이 붕괴되면 어디에서 어떤 원인으로 화재 났는지 확실히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며 

눈 앞에서 불이 나고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무작정 구조대를 비난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셈이므로. 

당시 실제로 붕괴된 A동의 북쪽 엘레베이터 타워가 서서히 붕괴된 A동 파편 위로 기울고 있다는 진단이 이뤄졌고, 

그로 인해 초기에 활발했던 구조손길도 안전 장치를 위한 H빔 설치로 인해 잠시 지연되었다.

매몰 52시간 만에 24명의 환경미화원들이 구출되었다.




참고로 화재로 인한 열기와 진압을 위한 소방수로 인한 생존자들의 희비도 엇갈렸다. 

지하 1층에서 70여시간 만에 구조되었다가 이송 도중 사망한 이은영은 몸에 2~4도 화상을 입고 

왼쪽눈이 파열되어 청색증에 시달린 채 발견되었고, 

그 다음에 발견된 생존자인 최명석의 근처에 있던 다른 생존자들 중 한 사람은 

구조대원들이 뿌린 물 때문에 익사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으며, 

유지환과 박승현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초기에는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소방수 덕분에 수분을 섭취하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과 더불어 사고 당시 줄기차게 나왔던 

1967년 9월에 발생했던 충남 청양의 갱도 붕괴사고의 16일 만의 생존자였던 광부 양창신의 인터뷰가 계속 방송이 되었는데 

그 인터뷰 내용은 그가 무너진 갱도안에서 물만 마시며 16일을 버텄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소방수에 의해서 11일차에 발견된 최명석이나 13일차에 발견된 유지환 씨 그리고 17일차에 발견된 박승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방수(水)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당시 지하주차장까지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지하에 붕괴된 콘크리트 더미 어딘가에 있는 차량의 화재로 발생하는 연기를 소화하기 위한 목적과 매몰자들의 생존을 위한 식수, 

그리고 당시 여름의 더위로 인해 혹시나 있을 생존자의 탈진을 막기 위한 온도 조절용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히 철거시 발생한 먼지를 줄이기 목적에 의한 소방수 살수는 당시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지하 3층 구조물까지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철거작업만을 위한 사람이나 장비가 투입되지 않았으며, 

모든 작업은 구조 작업 위주로 돌아갔었고 철거작업은 그에 의한 부수적 결과일 뿐이었다. 

당시 이러한 논쟁중의 하나가 포크레인의 투입이었다. 

굴삭기가 혹시나 있을 생존자를 부상 혹은 사망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굴삭기가 작동할 때 굴삭기의 삽 부근에서 구조대원들이 생존자 및 희생자의 확인도 병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최명석의 발견도 굴삭기를 이용한 해체작업 중 발견된 케이스다.


당시 몇몇 가지 구조 장비와 행위를 열거하자면, 

모든 구조행위를 일시 멈추고 실종자들의 삐삐 번호로 일괄적으로 전화를 해서

삐삐 소리로 생존자 구조 시도를 여러 차례했고 

미군에 의해 생존자 발견에 사용된다는 음파를 이용한 구조 장비인 스톨스(STOLS)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장비에 의해서 발견된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방송 밑 구조자 탐색을 위해서 직경 5cm 정도의 시추공 탐지카메라가 다수 투입되었다.



붕괴사고 며칠 후 자원봉사자들이 지하 3층으로 내려가 

생존자를 찾아봤지만 철수했으며 구조대원들은 

건물 붕괴 위험으로 생존자 수색조차 잠정 중단했고, 

사고 초기 서울시는 실종자를 200여 명으로 집계하다 

결국 400여 명으로 2배 정정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정을 보여주었다.

붕괴사고가 단일 사고 최다 인명피해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종자 접수 하나 제대로 못하는 서울시에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더하여 팔다리가 잘려 나간 시신들이 건축 잔해물과 뒤섞여서 유가족의 거센 항의도 있었다. 

게다가 당국에서 팔 2개+다리 2개+머리+몸통=시체 1구로 피해자 인원을 추산하여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 겨우 찾아낸 시신의 팔다리가 맞지 않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자 그제야 

잔해를 갖다버린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뒤져서 

142구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당시 난지도에서 알바 했던 사람의 경험담


유가족들은 거리 시위를 하는 등 격노했으며, 

특전사와 민간인 그리고 유가족 등 50여 명이 사비로 절단기 등을 구입해 

생존자 구조에 박차를 가했으나, 

현장 지휘소에서는 이들에게 철수하라고 했으며 재진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초기에 우왕좌왕하던 구조본부도 시일이 지나며 체계를 갖추어 

삼풍백화점 건너편 삼풍주유소를 구조본부로 삼고 구조 작업을 진행했다. 

구조본부는 일정 시기 이후에는 자원봉사자를 모두 철수시키고 

전문 구조대원만으로 구조활동을 전개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으며, 

이에 전문 인력으로 구성된 구조대를 구성했다. 


이러한 이유는 자원봉사를 핑계로 삼풍백화점 내에서 절도 및 취득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으로 

가장 큰 문제점은 자원봉사자에게 나눠주는 물품을 취득하려는 목적으로 유족을 사칭하여 자원봉사하려는 사람들이었으며, 

더하여 백화점 내의 절도행위였다. 더하여 유족들에게 접근하여 사체 발굴 이유로 금품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구속된 경우도 있다. 

애초에 그런 일에서는 일사 분란한 지휘 체계에 의해서 인력과 장비가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인력/장비 이동 등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비효율이 발생한다. 

따라서 자원봉사자 등의 일반인은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다르게 사회 각 계층에서 온정이 전해졌다. 

근처 군부대 장병들은 혈액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듣고 헌혈을 했고 위에도 서술 되어 있듯이 

건너편 삼풍주유소는 영업을 중단하고 사무실을 서초구 재해대책본부로 내놓았으며 

인근 부녀회원들이 컵라면과 빵 등을 작업자에게 배식했다. 

경쟁업체였던 현대백화점도 30~50명의 직원을 사고 즉시 파견해 구조대원들에게 커피와 라면을 제공하면서 

"비록 경쟁업체이지만 같은 백화점업계끼리 이럴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코미디언 조정현은 운영하던 뷔페 직원들과 사고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한 외국계 호텔에서도 음식을 내놓았다. 

또한 용접도구가 필요하다는 방송을 듣고 용접공 수십명이 달려왔고, 

한 업체에서는 최신식 조명도구를 설치하여 현장을 밝혔다. 

그 외에도 부상자 응급처치를 도와주기 위해 수녀들이 왔었고, 

한 상인은 수백장의 우의를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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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조정현

1980년, MBC 개그테스트를 통해 코미디 무대에 데뷔하여 

코믹한 제스추어로 "어쩔 수가 없어", "저러고 싶을까?!", “조상이 돌봤어”, “자네는 들어는봤나?", "웃기는 짬뽕이야" 등의 

수많은 유행어들을 히트시키며 활동해 왔다.


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