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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朝鮮通信使 조선통신사의 영향

朝鮮通信使 조선통신사의 영향


조선 통신사의 방문은 한양 → 에도까지 

대략 6개월에서 1년 가량 걸렸는데, 

조선 통신사가 지나갈 때마다 

일본이 들썩이고 유행이 바뀐다 할 정도로 

파장이 대단했다고 한다. 


대신에 바다를 건널 때 자칫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배가 뒤집혀 전원 끔살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들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제발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까지 했다. 

심지어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당첨(?)된 사람의 일가족은 당연히 눈물바다.

여-몽 연합군의 두차례의 대원정이 무려 태풍때문에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고 허무하게 끝났다는걸 생각하면,

전원 침몰을 두려워하는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었던 셈이다.



통신사의 서예작품을 얻으려고 성황이었다는 말도 있고,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이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조선 사신들이 오히려 중국 사신들보다도 극진한 대접을 받기도했다. 

천황 즉위식이 현재 돈으로 계산하면 230억 정도 였는데 쇼군이 조선 통신사가 도착할 때 사용한 비용이 670억에 가까운 돈을 썼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는 '국학파'라는 세력이 생겨날 정도였으며, 

일본 사람들이 통신사의 하인들에게 다가가서 글자 하나만 써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 때문에 오히려 이전의 전국시대보다 외국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창하게 들어오는 외국 사신이다 보니 볼만한 화제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일본 사람들은 조선->일본에서의 파견은 있었으나 

일본->조선으로의 파견이 없었으니 조선이 일본에게 조공을 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도 조선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는 했다. 

대신 한양에 입성하지는 못하고 동래, 즉 현재의 부산광역시 지역까지만 왔다갔다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사신의 한양 입성을 허용했다. 

한양에 동평관이라 하여 일본 사신을 위한 숙소가 있었다. 

물론 무로마치 시대와 에도 시대 사이인 전국시대에는 전혀 일본 쪽에서 사신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신들이 왕래했던 길이 그대로 침공로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조선 조정은 안보 차원에서 왜인들이 동래 왜관을 벗어나는 것을 엄금했다. 

수도까지 접대하는 사신과 대강 사신관 숙소에서 머물다 가는 사절의 차이는 나름 있는 것이다.

일본이 난학을 배울 때도 네덜란드인들을 이렇게 융숭한 대접은 하지 않았다. 

이런 후한 대접은 특히 1682년 도쿠가와 츠나요시 때 절정을 이루었다.

항목 참조. 애초에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교린이었지 사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다 보니 횟수에서는 확연히 조선이 밀려서 

조선의 일본에 대한 지식이 늘 한박자 늦는 엇박자를 치고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조선의 국왕 이순(조선 숙종)은 일본국 대군 전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10년 사이에 방문이 뜸하였습니다. 

요즘 듣건대, 전하가 새로 서통을 이어받아 해내를 편안하게 다독거린다 하니, 

이웃 나라의 의리로 보아 기쁨을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 상례에 따라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경하를 드리고 화목을 닦노니,

예는 그런 것 이지만 양국의 교린의 기쁨이야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애오라지 정성을 표합니다. 

바라건대, 전대의 공렬을 더욱 넓혀 길이 홍복을 누리소서. 

이만 줄입니다. 


기해년(1719) 4월 모일. 


숙종 → 도쿠가와 요시무네




일본국 원길종은 공경히 조선 국왕 전하에게 회답합니다. 

세 사신이 멀리 와서 방문함이 은근하여 옥체가 가승하심을 잘 알게 되니 만복이 함께합니다. 

바야흐로 아름다운 상서에 응하여 활법을 베풀어 짐짓 옛 전례를 준수하여 새 경사를 닦습니다. 

폐백 물건은 품목이 많으니, 어떻게 보답하오리까? 

이는 실로 두 나라가 길이 우호하는 정의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또한 예의가 더욱 깊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 물품을 통신사에게 부치오니, 정성스런 마음을 갖기는 피차가 다 마찬가지옵니다. 

이만 줄입니다. 


교호 4년(1719) 10월 11일 원길종源吉宗 돈수 운운



도쿠가와 요시무네 → 숙종




이와 같이 1719년 사행때 조선 숙종과 일본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간에 

오간 국서를 봐도 두 나라의 대등성과 조선 통신사의 목적과 역할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이게 정말 따로 항목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있냐고 묻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자면, 

만약 개화기 이후까지 일본이 조선을 멸망시켜 일제 강점기의 시대를 열지 않고 

이런 통신사로 평화롭게 너도나도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었다면, 

임진왜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지금까지도 사이가 좋은 이웃나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