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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朝鮮通信使 조선통신사의 규모

朝鮮通信使 조선통신사의 규모



초기의 그리고 오늘날 와서 강조되는

문물교류의 통신사와 달리

최후의 통신사는 훨씬 규모가 축소되었다. 

정조 11년(1787)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했으나 

실권자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에도에서 열리던 통신사를 

쓰시마로 옮기기를 희망했고(1794), 조선은 17년간 거부하다가 순조 11년(1811) 와서야 승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통신사는 없었다

(여담으로 바로 그 해 홍경래의 난이 발생했다). 

이에나리 자체가 재임기간이 길어 헌종 때인 1837년에야 죽었으므로

양국이 딱히 통신사를 보낼 이유도 없었고.


전성기 때는 이 조선 통신사가 

양국의 자존심 대결의 성격도 띄고 있었던 탓에

투입된 예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조선에서는 경상도 지방의 예산을 몽땅 투입해야 했고, 

일본에서도 조선 통신사 접대비용 예산문제로 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일본 당시 쌀 수확량의 12%가 소요되었다고 하며(옥스퍼드 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 

통신사를 맞이하는 장소를 에도에서 쓰시마로 옮기자 한 것도 교통비와 기타 등등의 예산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얼핏보면 별 의미없는 뻘짓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온 이유는 양국이 전부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먼저 가장 가까운 나라와 교린을 맺는 것이 국제관계의 도리라는 점도 있었고, 

서로 교린관계를 나누면서 혹시 모를 조선의 군사적 위협을 덜자는 점도 있었다. 

실제로 왜구 토벌을 같이 하기도 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력이라는 정치적인 성과와 더불어, 

공공연하게 막부의 권력이 중국에도 알려질 수 있게 되니 중국과의 교섭에도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 있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백성들에게 조선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선전하여 

일본이 마치 조선을 종속국으로 거느리고 있는 양 하며 국가적 자부심을 높였고,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는 조선은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이라고 속여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다(해당링크)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교적인 교린을 통해 변경이 편해질 수 있고, 

일본의 지형과 풍속 등을 살펴 유사시에 제압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을수 있고, 

대마도 등지에서 활개치는 왜구들의 폐해를 줄일 수 있고 

궁극적으론 자신들의 '예'로 일본을 교화시킬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통신사 수행 무관들을 통해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신무기를 몰래 구하는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따라 간 자들이 남긴 기행 기록 가운데는 

일본의 먼 미래 정세, 특히 덴노의 조정이 있는 교토의 경우 덴노의 조정과 관백(쇼군)의 막부를

각각 왕자(王者)와 패자(覇者)라 인식했다. 

대놓고 막부, 도쿠가와 쇼군들을 왕망이나 조조로 비유하기도 했고,

덴노와 구게 앞에서 존왕론을 강의하거나 토막(討幕, 막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막부에 적발되어 처형되는 사건도 있었다.


기록에는 또한 정통성을 갖춘 진정한 군주인 덴노가 

무사들을 뒤에 거느린 힘 있는 권신(權臣)에 불과한 쇼군의 힘 앞에 눌려 

실권을 빼앗긴 것에 비분강개하던 교토 지식인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



성대중이나 남옥, 조명채, 원중거 등 실제 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조선 통신사 수행원들은 

그 주고 받은 이야기를 기행문에 적고 한결같이

"지금의 막부가 언젠가 힘이 쇠약해지고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무리들이 움직일 때가 오면 

분명 덴노를 둘러싸고 국권을 쟁탈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고 판단했고, 

그 예상은 백여 년 뒤에 그대로 적중했다. 




막짤은 시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