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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 나현선

역대 조선 통신사 역대 조선 통신사 순서연도정사부사종사관총인원목적 및 특징초대1607년(=선조 40=게이쵸(慶長) 12)여우길(呂祐吉)경섬(慶暹)정호관(丁好寬)467명 국교 회복 2대1617년(=광해군 9=겐나(元和) 3)오윤겸(吳允謙)박재(朴梓)이경직(李景稷)428명 오사카 전투 직후 3대1624년=(인조 2=칸에이(寬永) 1)정구립(鄭口岦)강홍중(姜弘重)신계영(辛啓榮)300명(역대 최소 인원) 도쿠가와 이에미츠 취임 4대1636년(=인조 14=칸에이 13)임광(任絖)김세렴(金世濂)황호(黃帍)475명 병자호란 중 5대1643년(=인조 21=칸에이 20)윤순지(尹順之)조경(趙絅)신유(申濡)462명 도쿠가와 이에츠나 탄생 6대1655년(=효종 6=메이레키(明曆) 1)조형(趙珩)유창(兪瑒)남용익(南龍翼)488명 이에츠나 취임.. 더보기
朝鮮通信使 조선통신사의 규모 朝鮮通信使 조선통신사의 규모 초기의 그리고 오늘날 와서 강조되는문물교류의 통신사와 달리최후의 통신사는 훨씬 규모가 축소되었다. 정조 11년(1787)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했으나 실권자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에도에서 열리던 통신사를 쓰시마로 옮기기를 희망했고(1794), 조선은 17년간 거부하다가 순조 11년(1811) 와서야 승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통신사는 없었다(여담으로 바로 그 해 홍경래의 난이 발생했다). 이에나리 자체가 재임기간이 길어 헌종 때인 1837년에야 죽었으므로양국이 딱히 통신사를 보낼 이유도 없었고. 전성기 때는 이 조선 통신사가 양국의 자존심 대결의 성격도 띄고 있었던 탓에투입된 예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조선에서는 경상도 지방의 예산을 몽땅 투입해야 했고, 일본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