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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반촌이 가진 또 하나의 재미있는 특징은, 이곳이 범법으로 규정된 금란(禁亂)에서 자유로운 곳이었다는 점이다.


 

그림(상) -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 부분, 1770년대, 호암미술관 소장 

그림(중간) - ‘Map of Seoul’, 1900년, 영국왕립아세아협회 소장 

그림(하) - 현재의 서울 종로구 명륜3가동 주변





위의 그림 중 한양도성도에 표시된 두 개의 원은, 성균관 앞 좌우 동반촌, 서반촌의 위치를 나타낸다.

현재의 주변지도와 비교해보면 그 지역의 범위가 대강 어디까지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데, 

지금의 창경궁 월근문까지 내려오는 부분이 반촌의 하한선이었다. 

혜화문(동소문)에 이르는 곳까지가 반촌의 경계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 부근 일대에 현재에도 소의 도살과 판매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현재 이 지역은 학생들을 위한 원룸과 하숙집 등 주거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양도성도를 가늠해볼 때 현재 지도 이미지에서 빨간색 선으로 표시한 부분이 대략적인 동반촌과 서반촌의 주 지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반촌이 가진 또 하나의 재미있는 특징은, 

이곳이 범법으로 규정된 금란(禁亂)에서 자유로운 곳이었다는 점이다. 

금란이란 소나무 벌채 금지, 임의적 도살 금지, 양조(釀造) 금지를 가리키는 말로, 금송(禁松), 금도(禁屠), 금주(禁酒)를 말한다. 

앞의 죄를 범한 경우라 할지라도 반촌에 숨는다면 포교가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었다. 

요컨대 반촌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그것은 문묘의 대성전(大成殿)이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4성(四聖)과 10철(哲), 송조6현(宋朝六賢)의 위패를 모시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영조실록’ 6년의 기록에 보면 금송(禁松) 및 살인죄를 범한 사람이 반촌으로 숨었다고 고하는 부분이 나온다. 

영조는 성균관 최고책임자인 대사성에게 반촌을 뒤지라고 명하지만, 

유생들이 단체로 단식투쟁을 하는 등 항의행동을 보인다. 

성균관 근처에서 범인을 검거했다가 포도대장이 파직된 경우도 있었다. 

이른바 왕권도 어찌하지 못하는 '유교 이념의 권역'이었다.



지배 계층이 자신의 뒤를 이어갈 젊은 지배 계층을 만들어내는데 큰 공을 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교 이념을 한양의 도시계획 전반에 투영하고자 했던 그들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또 다른 권력계층의 양성을 위해 궁 옆에 독특한 지역을 만들었다. 

서로 상충하는 요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곳은 뜯어볼수록 희한하다. 

가장 우대를 받던 계층과 무시당하던 계층이 붙어 있는 지역이었고, 

새파란 유생들이 모여 식사 거부를 통해 왕권을 흔들기도 했으며, 

다들 기피하는 가축 도살이 이루어졌지만 한양 곳곳으로 쇠고기는 잘도 팔려나갔다.



조선의 중심부, 가장 자유로웠던 동시에 섬처럼 고립된 곳이었던 성균관과 반촌은 한양의 성역이었다. 

이념과 문화적 편견이 일구어낸 보이지 않는 울타리는 지금 살펴보아도 무척 흥미롭다.



Reference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이정명, <뿌리 깊은 나무>, 밀리언하우스, 2006 

한국건축역사학회, <한국건축답사수첩>, 동녘, 2006 

정은궐,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파란미디어, 2007 

강명관, <사라진 서울 - 20세기 초 서울 사람들의 회상기>, 푸른역사, 2009

KBS 역사야놀자, <역사야 놀자 1 : 조선시대>, 경향미디어, 2009 

조수삼 저, 안대회 역, <추재기이 秋齋紀異>, 한겨레출판, 2010 

안대회,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한겨레출판, 2010


Reference Website 

성균관 http://www.skk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