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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지식

현재의 명륜동과 혜화동 사이로 우암 송시열이 머물던 곳이어서 송동이라 불림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한 안향(安珦, 1243~1306)은 충렬왕 때의 학자로, 

성균관의 부흥을 위하여 모금운동을 벌이고 학생들을 위해 책과 노비를 기증하였다고 한다. 

이때 바친 노비의 수가 백여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며, 

반인들은 이 안향의 노비 후손이 번성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경전을 외우고 글을 쓰는 유생들과 이들을 가르치는 대사성(大司成) 이하 관료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곳이었으므로 

이들을 위한 인력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주로 소와 돼지의 도살, 

가사노동과 심부름을 비롯한 잡역이 대부분이었으며 반인의 자식들은 어른이 되어 부모님의 일을 물려받아

 마찬가지로 성균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돌보았다. 

이를테면 반촌의 사내와 성균관 소속의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는 성균관 소속의 재직(직동)이 되었고, 

장성하여 수복이 되었다.



반인이 안향의 노비로 있던 시절, 

그들은 송도(개성) 지역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다. 

안향이 노비를 성균관에 희사한 이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개국과 함께 성균관이 한양으로 위치하게 되자 

그들도 따라 내려온 것인데,

주변 지역과 교류가 없던 그들은 풍속과 말투 등이 서울 사람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공간상으로는 한성 한복판에 위치해 있지만 그들은 섬과 같은 곳에 고립되어 있었다. 

반촌의 사람들은 타 지역의 사람들과 혼인과 교제 등을 함에 있어 천대 받았기 때문에 

반인들끼리만 뭉쳐 살았고, 외부인들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는 일종의 '게토(ghetto)'였다.



미래의 엘리트를 키워내는 성균관을 위해 존재하는 반촌은, 

귀하디 귀한 양반 자제들과 한양 내의 곳곳에 쇠고기를 공급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반인들이 소의 도살과 판매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게 하는 동시에, 

세금으로 쇠고기를 받아 그것을 유생들의 반찬으로 사용한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림(좌) - 성균관 내 유생들의 식사공간이었던 진사식당 / (우) 구한말 푸줏간




멸시 받던 계층이었지만, 이런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추재 조수삼이 쓴 ‘추재기이(秋齋紀異)’에는 조선 후기 비주류 인물들의 기이한 이야기가 정리되어 있는데, 

그 중에 특별한 반인 한 명이 등장한다. 정조 시대의 반민인 그의 이름은 정학수(鄭學洙)로, 

본디 성균관 수복으로서 문묘를 관리하던 노비였다. 

그는 송동(현재의 명륜동과 혜화동 사이로 우암 송시열이 머물던 곳이어서 

송동이라 불림)에 반촌 사람을 위한 서당을 열고 많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힘썼다. 

추재는 '그의 문하에서 학업을 성취한 자가 많아 반촌 사람들이 그를 정 선생이라고 칭송했다'고 적고 있다. 

노비 출신이었지만 교육자로서의 부단한 노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정조 또한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정학수의 서당 자리에 지금은 서울과학고등학교가 자리한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 위치에 교육시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